박수근 작가는 서민을 주제로 한 절제된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을 많이 그렸다. 주제에 있어서 그가 실제로 체험하였던 주변의 가난한 농가의 정경과 서민들의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생활 정경을 주로 담았다. 또한 이러한 주제에 풍부한 서정을 가미해 일관성 있게 추구했다. 그리고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향토색 짙은 자신의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다.
천경자는 전남 고흥 출신으로 전남여고를 거쳐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광주여고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때부터 본명인 옥자 대신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천경자의 작품세계는 1942년부터 1969년까지 삶과 죽음 등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고, 1970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하려는 시기였다. 특히 꽃과 여인을 소재로 환상을 표현하거나 해외여행에서 느낀 이국적 정취를 통해 원시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있다.
천경자는 전남 고흥 출신으로 전남여고를 거쳐 1944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46년 광주여고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으로 뽑히기도 했다. 이때부터 본명인 옥자 대신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천경자의 작품세계는 1942년부터 1969년까지 삶과 죽음 등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보여주고 있고, 1970년부터 1990년대까지는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하려는 시기였다. 특히 꽃과 여인을 소재로 환상을 표현하거나 해외여행에서 느낀 이국적 정취를 통해 원시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있다.
장욱진 작품에 드리운 단순성과 추상성을 두고 혹자는 서구의 화가인 파울 클레 등의 영향을 말하기도 한다. 장욱진은 해방 이후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아이·가축·마을·새들은 극히 단순화된 구도와 배치 속에서 동화와도 같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의 그림에는 서구미술에서 중시했던 명암, 투시법, 화면분할과 같은 요소들이 일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림의 주된 대상들은 평면적인 공간배치 속에서 평화롭게 존재하며 사람과 자연은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처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장욱진 작품에 드리운 단순성과 추상성을 두고 혹자는 서구의 화가인 파울 클레 등의 영향을 말하기도 한다. 장욱진은 해방 이후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사람·아이·가축·마을·새들은 극히 단순화된 구도와 배치 속에서 동화와도 같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의 그림에는 서구미술에서 중시했던 명암, 투시법, 화면분할과 같은 요소들이 일체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림의 주된 대상들은 평면적인 공간배치 속에서 평화롭게 존재하며 사람과 자연은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모습처럼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있다.
소장 경위 :이중섭이 중학시절부터 소그림을 그린 배경에는 프랑스 야수파 루오(Georges Rouault 1871~1958)의 업적을 적극적으로 동경했던 바가 크다. 이 흰소 역시 빠른 필선, 다부진 골격과 상기된 눈빛과 붉은 코가 특징이다. 흰소는 한국인을 상징한다고 한다.감정 소견 : 감정소견 미8군 CID 한국인 감찰관 홍창덕씨가 양화가 이상우(54년 당시 미술품 재료상)씨로부터 미군부대에서 미술재료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결해 준 답례로 받았던 그림이다. 현 소장자는 그의 아들로부터 받았다.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이희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술교사였던 임용련의 지도를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분카학원 미술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독립전과 자유전에 출품했다. 1940년에는 미술창작가협회전(자유전의 개칭)에 출품하여 협회상을 수상하였다. 1943년에도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하였다. 1945년 원산에서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와 결혼하여 두 아들이 있었고, 1946년원산사범학교에 미술 교사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 도착했다가 생활고로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홀로 부산, 통영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하였다. 1956년 나이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그의 작품 소재는 소, 닭, 어린이, 가족 등이 가장 많다. 소재상의 특징은 향토성을 강하게 띠는 요소와 동화적이면서도 자전적인 요소이다.
이인성은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인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 특선을 거듭하여 천재적인 화가로 각광을 받았다. 1937~1944년의 마지막 조선미술전까지는 가장 성공적인 추천작가로 참석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나라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인성은 대구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하여 보통학교 졸업 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았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로 1936년까지 천부적인 재능과 신선한 표현 감각을 발휘한 수채화와 유화로 입선. 특선을 거듭하여 천재적인 화가로 각광을 받았다. 1937~1944년의 마지막 조선미술전까지는 가장 성공적인 추천작가로 참석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우리나라 수채화의 본질적 묘미와 높은 차원의 표현성이 잘 나타나 있다.
양달석은 1908년 경상남도 거제도 출생으로 진주 공립농업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그림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가 입선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그림활동을 계속하였다. 작품은 시골의 자연환경과 농촌생활의 서정을 동화처럼 정겹고 평화롭게 전개하는 독특한 세계로 일관하였다. 그림에는 소년·소녀·아낙네와 풀밭·소 등이 등장하며, 표현기법이 매우 동심적이어서 ‘동심의 화가’로 불린다.